문헌록 전자족보(대동보) > 문헌록
           
1. 문헌 목록 〉11. 11世 〉20. <태사공>생원공수억비명(生員公壽億碑銘)
1. 문헌 목록 〉12. 12世 〉1. <요재공>죽천공휘천원묘갈명(竹泉公諱天元墓碣銘)
1. 문헌 목록 > 11. 11世 >  
21.<태사공>성균생원공휘사의묘갈명(成均生員公諱思義墓碣銘)
<태사공후>성균생원공휘사의묘갈명(成均生員公諱思義墓碣銘) 宇萬以趙氏命銘厥先祖考縣監公衣履之藏既訖將命三季士驥燮章燮維燮拜起而請曰縣監公立慬實蹟既蒙揄揚矣生員公之墓將繼有石焉願卒惠焉再辭付獲命謹取其家牒而序次之曰公諱思義字文彦生卒未詳 萬曆戊子中生員公壬辰燹考縣監公以康津宰收率民兵將勤王公陪父護軍至淳化之射亭野猝遇賊兵縣監公杖劒先登斬賊數十百人中九而殞公方在後督戰奮不顧身聞縣監公己立慬號痛誓天冒刃馳入賊徒潰散直入積屍中求父屍不得乃以甲胄衣履歸葬于廣德山事舞袖洞蹟公氣義與孝思忘功討復枕戈從事而向後施為不少槩見必家亂後沈晦文獻無徵可慨也己趙氏其先玉川人有諱洪珪高麗密直一世而光禄上柱國 璵二世而中門祗候元琦正順大夫浣中郎將從南連世清顯高祖季善彰信校尉曾祖之瑗展力副尉祖世球叅奉考愈即縣監妣光山金氏父承旨世重公娶高靈申氏大有女一男與復號南隱奉事陞同中樞孫四國良國賓國儉國訥公墓在廣德山下枕乾坐夫人合封銘曰從父討賊厥考有子父死於忠復讎其志杖劒遂賊所向披靡求屍不得葬以衣履向後討復必不但己文獻無徵据實而止公私野錄庶或載己 歲辛丑二陽月 幸州 奇宇萬 撰 성균생원공휘사의묘갈명(成均生員公諱思義墓碣銘) 우만(宇萬)이 조씨의 청문에 따라 그 선조 현감공 묘갈명을 쓰고 일을 마치니 명을 받은 三수사(秀士) 기섭(驥燮) 장섭(章燮) 유섭(維燮)이 절하고 일어나 청하여 가로되 현감공의 전사한 실적은 이미 찬양을 받았으나 생원공의 묘소에 장차 돌을 세울 것이니 원컨대 이어 은혜를 베풀어 달라 하였다. 두번 사양하다 할 수 없어 삼아 그 가첩에 의하여 서차하니 공의 휘는 사의(忠義)요 자는 문언(文彦)이며 생졸은 미상이고 一五 八八(萬曆戊子)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아버지 현감공이 강진재로 민병을 모집하여 근왕(勵王)할 때 부친을 따라 호군하고 순화의 사정들에 이르러 졸지에 적군을 만나 현감공이 장검을 빼어 들고 먼저 나가 적수 十百인을 쳐 죽이고 탄환을 맞고 운명하니 공이 후진에서 몸을 돌아보지 않고 독전하다가 현감공이 이미 전사하였음을 듣고 울부짖어 하늘에 맹서하고 칼날을 무릅쓰고 달려들어 가니 적진이 무너진지라 바로 쌓인 시체 중에 들어가 아버지 시체를 찾다가 찾지 못하고 이에 갑옷과 의관으로써 광덕산하 무수동에 장사하였다. 공의 의기를 이어 효도 생각이 깊어 도복할 뜻이 간절하여 창칼을 베개하고 종사한 뒤에 경략(經略)한 공이 불소하나 대개 그가 화 뒤에 잠기고 어두어 문헌이 증거가 없으니 가히 슬프다. 조씨는 옥천인으로 휘 홍규(洪珪)는 고려밀직이요 광록상주국 휘 여(璵) 중문지후 원기(元琦) 정순대부 완(浣) 중랑장 종남(從南)이 대를 련하여 맑에 나타났다고 조 계선(季善)은 창신교위요 증조 지원(之瑗)은 전력부위며 조 세구(世球)는 참봉이고 고유(愈) 현감이요 비(妣)는 광산김씨 승지 세중(世重)녀였다. 배는 고령신씨 대유(大有)녀요 남 흥복(興復)의 호는 남은(南隱) 벼슬은 봉사로 동지 중추에 올랐으며 손자는 국량(國良) 국민(國賓) 국검 (國儉) 국눌(國訥)이고 공의 묘소는 광덕산 아래 건좌원이요 부인을 합봉하였다. 새겨 가로되 아비를 좇아 적을 토벌하니 그 아비에 그 아들이로다. 從父討賊厥考有子 아비가 충의에 죽으니 원수 갚을 그 뜻으로 父死於忠復讎其志 칼을 집고 적을 쫓으니 향한바에 흩어져 쓰러진다. 杖劒遂賊所向披靡 시체를 찾지 못하여 옷과 신발을 묻었다. 求屍不得葬以衣履 향후에 토복을 반드시 말지 안했을 터인데 向後討復必不但己 문헌이 증거가 없으니 실상에 의거하여 고치고 文獻無徵据實而止 공사야록에 거이 실였을 다름이다 公私野錄庶幾載己 歲辛丑二月陽 행주(幸州) 기우만(奇宇萬) 撰
 
1. 문헌 목록 〉11. 11世 〉20. <태사공>생원공수억비명(生員公壽億碑銘)
1. 문헌 목록 〉12. 12世 〉1. <요재공>죽천공휘천원묘갈명(竹泉公諱天元墓碣銘)